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이래로 어떻게 하면 내가 읽고 싶은 그 많은 책들을 빠른 시간 내에 효과적으로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늘 고민거리였다. 처음 접한 독서법에 관한 책은 안상헌의 ‘어느 독서광의 생산적 책읽기 50’이었다. 이 책으로부터 삶에 대한 훌륭한 조언과 통찰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았지만 정작 독서법에 관한 내용은 부실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고 내 나름의 독서 방법을 만들어 시도해 왔지만 항상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책,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은 쓸데없는 군더더기는 다 빼고 진짜 책을 읽는 방법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매일 매일 서점에는 신간이 쏟아져 나오고, 선현들이 써놓은 고전들은 산더미 같으며, 지적 요구 때문에 혹은 호기심 때문에 읽고 싶고, 읽어야만 하는 책들은 자꾸만 쌓여간다. 그러다 보니 점점 ‘양’의 독서에 집착을 하게 된다. 이 책의 핵심은 슬로 리딩 즉, 책을 천천히 읽으라는 것이다. 저자는 ‘양’의 독서에서 ‘질’의 독서로 전환을 요구한다. 저자는 속독에 대해서 ‘속독은 내일을 위한 독서’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경고한다. 속독을 하게 되면 금방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피상적인 정보만을 보충하게 되며 오독의 가능성 또한 높다. 반면에 슬로 리딩은 오년 후, 십년 후를 위한 독서이며,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일, 시험, 면접에도 도움이 되고 한 사람의 인간성의 깊이를 더해준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양’의 독서와 ‘질’의 독서. 피상적인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서라면 양의 독서가 더 효과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질’의 독서가 필요하다. 나는 지난 독서 경험에서 속독과 슬로 리딩의 차이를 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속독을 한 경우에는 단지 며칠만 지나도 그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가 하면 내 삶과 구체적으로 연결되는 내용들은 거의 없었다. 반면에 슬로 리딩을 한 경우에는 내용이 쉽게 잊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삶의 국면에서 문득 슬로 리딩한 내용들이 떠올라 내 삶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된다. 오래전에 읽은 로버트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에서 보상과 처벌에 관한 내용이 짧게 언급 되는데, 나는 그 문제를 가지고 꽤나 오랫동안 고민했었다. 바로 슬로 리딩을 했던 것이다. 그런 슬로 리딩을 한 보상과 처벌에 관한 내용은 내 머릿속에 깊이 박히게 되었고 사람과의 관계 문제나 혼자서 공부를 할 때 문득 그 내용이 떠올라 그 방법이 이용되곤 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나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이러한 슬로 리딩에 대한 적용이 이 책에는 문학작품, 특히 소설에 치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분명 문학작품은 슬로 리딩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비문학의 경우는 어떠한가? 비문학 작품의 경우에도 이러한 독서법을 적용해서 읽어야 할까? 일본의 지성이라 불리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법을 보면 이 책의 저자와는 반대로 속독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학 작품은 슬로 리딩, 비문학 작품은 속독을 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해볼 문제다.

책읽기는 평생 해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내용들이 정답을 아닐지라도 책을 읽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하다. 똑같은 책을 읽었더라도 사람마다 그 책에 대한 이해도 다를 것이고 책에 대한 느낌도 천차만별일 것이다. 깊이 있는 독서를 할 것인지 가벼운 독서를 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이왕 책 읽기를 시작했다면 즐거움과 삶의 질을 높여주는 깊이 있는 독서를 선택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 책에서 말하는 독서란, 단순히 피상적인 지식으로 인간을 꾸며주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그 사람을 바꾸어 사려 깊고 현명하게 만들며 인간성에 깊이를 더해주는 것을 뜻한다.

 

슬로 리딩은 인생을 오늘 지금 이 순간보다 더 풍요롭고 개성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독서이다.

 

차이란 항상 미묘하고 섬세한 것이다.

 

독자가 책을 선택하듯 책 또한 독자를 선택한다.

 

독서에는 시기가 있다. 책과의 절묘한 만남을 위해서는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그 이전의 젊은 시절의 기억에 석연치 않은 무언가를 각인시킬 뿐인, 삼진 혹은 파울 같은 독서법에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법이다.

 

외관의 변화는 사진이나 동영상 보존이 해준다. 그러나 내면의 변화를 실감나게 해주는 것은 책이다.

 

소설을 읽는 방법에 ‘정답’은 없다.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상을 과신하지 않는 태도이다.

by 범버냄 | 2008/09/07 10:54 | 트랙백 | 덧글(0)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 - 허련순

바로 내 옆집에 사는 아저씨는 조선족 아저씨다. 문득 이 소설에 나오는 조선족들처럼 그 아저씨도 배를 타고 밀항 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살다보니 알게 모르게 주변에서 조선족들을 많이 보게 된다. 내 옆집 아저씨도 그렇고 식당에 가도 말씨가 조금 어눌한 조선족들을 많이 보게 된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들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삶은 어떻고 왜 밀항까지 하면서 한국에 와서 돈을 벌려고 하는지에 대해 나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은 한민족이면서도 다른 사람으로 취급하는 조선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이 책을 몰입해가며 읽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사건들에 대한 개연성 부족 때문이었다. 내가 어떤 소설을 보고 그 소설을 평가하는 기준 중에 하나가 바로 인과성, 사건들에 대한 유기적인 연결 관계이다. 헌데 이 소설에서는 그러한 점들이 부족해 보였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들이 설명되지 않은 채 일들이 발생해 버린다. 어쩌면 중요하다고도 볼 수 있는 주인공 ‘세희’가 자식들을 남겨두고 왜 떠나는가에 대한 설명이 책에는 나와 있지 않다. 그저 살기가 힘들기 때문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사건에 대한 필연성이 적으니 글을 읽는데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소설의 중간 중간 작가의 생각이 들어나는 부분에서 식상함, 촌스러움, 낯간지러움 같은 것들이 느껴졌다. 예를 들어 319p에 나오는 책장 묘사에서 죄와 벌, 노인과 바다, 그리스 로마 신화, 신곡 같은 것들을 일일이 언급하는 부분이 그렇다.

이 책에는 ‘나비’가 많이 등장한다. 책의 제목에도 나비가 들어가 있고, 용이와 동일시 된 애완견 이름도 나비이다. 그리고 후반부에도 배 안으로 들어오는 나비가 등장한다. 나비란 무엇인가. 이 책의 제목은 왜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인가. 책에 나오는 바처럼 나비에게는 집이 없다. 그래서 나비는 날아가 앉는 곳이면 다 집인 줄 안다. 이것은 어느 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하는 조선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조선족을 한국인으로 봐야 될까, 중국인으로 봐야 될까. 그들은 한국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니다. 분명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고 중국에 살지만 조선의 피를 물려받은 조선족이라고 소외당하고, 같은 조상으로부터 피를 물려받았지만 한국에 오면 지금껏 우리와 다른 곳에 살아왔다는 이유로 한국인으로부터도 소외당한다. 조선족들은 그들 자신이 누구일까라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집이 없다. 중국의 연변도, 한국도 그들에게 진정한 집이 아니다. 그저 자신들의 집이 그 곳이라고 믿고 살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책에서는 나비를 핵심 키워드로 쓴 것이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라는 물음은 ‘나비의 집은 없다’는 대답을 내포하고 있다. 결국 작가는 조선족의 정체성에 묻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환상에 속는 것은 속을 수밖에 없어서가 아니라 속고 싶어서이다. 20p

 

인간은 인간다운 환경에서만 체면이 유지되는 것이다. 27p

 

죽음의 한순간에 비하면 삶이란 너무 지루한 것 같기도 했다. 84p

 

사람이란 언젠가는 죽어야 하오. 그러니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지... 147P

 

사내란 한 번 결정하면 뒤돌아봐선 안 돼. 198p

 

여자와 남자 사이의 감정이란 정말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244p

 

내가 사는 이유도 모르는데.... 327p

 

삶과 죽음이란 원래 그렇게 함께 있는 것인지 모른다. 340p

by 범버냄 | 2008/05/09 14:39 | 이랑 | 트랙백 | 덧글(0)

파스칼의 팡세 생각하는 갈대 - 박철수

이 책은 팡세의 완역이 아니라 박철수 목사가 편역을 하여 출판한 책이다. 이 책은 저자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기독교적 색체가 강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파스칼이라는 인물은 수학자로 볼 수도 있고, 물리학자라고 볼 수도 있고, 철학자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 책에서는 <팡세>의 내용을 중심으로 파스칼의 종교사상가적인 측면만을 집중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파스칼이라는 인물을 한마디로 말하면 천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9세의 나이에 요절하였지만 그의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들이었다. 파스칼의 원리, 적분법 창안등 과학사에 길이 남을 공헌을 하였다. 그런데 그의 그러한 업적 뒤에 생(生)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것은 독실한 신앙생활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변증론>을 집필하기 위하여, 단편적인 초고를 쓰기 시작하였으나 병고로 인하여 완성하지 못한 채, 39세로 생애를 마쳤다. 그 초고가 바로 <팡세>다.

 

이 책에서 느껴지는 것은 파스칼이 인간이란 존재를 참으로 나약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파스칼은 심지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독교는 별나다. 기독교는 인간이 비열하고 가증스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면서도 하나님과 같이 되도록 명한다.>229p 그는 인간에 대한 불완전성과 원죄에 대해서 거듭 강조하고 있다. 유일신이 존재하고 인간은 참회하고 회개하여야 한다는 입장은 중세를 지배했던 세계관이다. 인간의 이성, 육체, 감정을 부정하고 오직 신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파스칼과 동시대에 살았던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성을 강조함으로써 근대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19세기의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며, 당시까지 서구사회를 지배하고 기독교적 문화와 가치체계를 송두리째 부정했다. 신 중심의 기독교적 문화가 인간 중심적인 문화로 전환되어야 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 이후 인간의 이성을 강조한 근대가 탄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파스칼은 중세의 기독교적 가치를 추구한 마지막 세력 중에 하나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나약하다는 것,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신에게 의지하는 것은 인간을 한계 속에 가두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것 때문에 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자기 자신을 가두는 행위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 중심의 시대였던 중세를 인간의 암흑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살았기 때문에 중세시대에는 인간 문명의 크나큰 발전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신 중심의 세계관을 깨고 나서야 인간의 문명은 근대로 진입이 가능해 진 것이다. 근대 이후로는 인간을 한계 속에 가두어 놓지 않는다. 인간 자신이 신이 되려고 한다. 인간의 이성을 중시한 세계관은 신을 모방한 과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인간이 종교를 믿는 것은 어쩌면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불안과 두려움이 아닌가 싶다. 유한한 삶이 주어진 인간들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밖에 없고 모든 것들이 불확실한 것들이다. 그런 필연적 죽음과 불확실성 속에서 의지할 곳을 찾게 되는데 그 안식처가 바로 종교인 것이다. 종교를 통하여 인간은 비로써 안심을 하게 된다. 죽음 이후에 대한 확신 같은 것들로 말이다. 사람들은 주로 자신이 심적으로 굉장히 나약해 졌을 때 주로 종교를 찾게 된다. 예를들어, 나 같은 경우에는 심적인 스트레스가 굉장한 군대라는 곳에서 열성적인 종교인이었다. 종교라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인간이라는 나약한 존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근원의 안정을 주는 종교 때문일 것이다. 파스칼이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이 어쩌면 종교적인 안정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파스칼이 분명 위대한 업적을 후대에 남긴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세계관은 중세시대에 얽매여 있었고 그 것을 벗어나지 못했다. 파스칼이 남긴 유명한 문구인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를 생각해 본다. 인간은 심히 나약하고 연약한 존재이고, 또한 살아가면서 자신의 행동과 사상, 사고가 흔들릴 수도 있지만, 인간은 생각할 수 있기에 위대한 존재로 인식될 수 있다.라고 생각해 왔는데, <파스칼의 팡세 생각하는 갈대>를 읽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파스칼이 이야기한 이 말의 본질은 인간은 나약하면서도 생각하는 존재이므로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인 신상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에 대한 믿은 인간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유 없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종교란 무엇이고 내가 왜 그 종교를 믿어야 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by 범버냄 | 2008/05/01 21:30 | 이랑 | 트랙백 | 덧글(0)

◀ 이전 페이지다음 페이지 ▶